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줄리어스 어빙 (문단 편집) === ABA 시절 === 이미 대학에서 더 보여줄 것이 없던 이 농구천재를 NBA가 주목하지만, NBA는 대학을 졸업해야 드래프트에 지명될 수 있었고 어빙은 좀더 일찍 농구로 돈을 벌고 싶어했다. 그런 어빙의 눈에 들어온 리그는 당시 NBA의 경쟁 리그였던 ABA. NBA의 후발주자로서, NBA를 따라잡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[* 3점슛, 치어리더, 덩크 콘테스트등 다양한 시도가 많았다.]를 해오던 ABA는 과감하게 대학 중퇴선수에게도 문호를 개방했고, 어빙은 대학 3학년을 마친 1971년 ABA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 자유계약 선수로 입단했다[* 사실 여기엔 NBA의 레전드 중에서도 레전드로 꼽히는 [[빌 러셀]]의 조언도 한몫했다.]. 그리고 루키 시즌 어빙은 평균 27.3점을 기록하고 ALL-ABA 세컨드팀에 선정됐으며 신인상까지 거머쥐고, 스콰이어스는 45승 39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. ABA에서 화려한 루키시즌을 마친 어빙은 1972년 NBA 드래프트 지원이 가능하게 되자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. 그는 1라운드 12위로 [[밀워키 벅스]]에 지명되지만, 실제로는 그의 에이전트가 어빙과는 상관없이 [[애틀랜타 호크스]]와 계약을 맺게 되어 삼중계약자(스콰이어스,벅스,호크스) 신분이 된다. 때문에 가장 먼저 계약했던 스콰이어스가 어빙과 NBA에 소송을 걸고, 승소하면서 어빙은 ABA 스콰이어스로 돌아가게 된다. 하지만, 계약난항 끝에 스파이어스에서 1시즌 더 뛴 어빙은 ABA의 최강팀인 뉴욕 네츠로 트레이드된다. 어빙의 몸값을 감당하기에 스콰이어스의 자금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. 뉴욕 네츠에서 활약한 어빙은 2차례의 득점왕, 3연속 MVP, 2차례 플레이오프 MVP등 ABA를 씹어먹는 대활약을 했다. ||[[파일:external/prohoopshistory.files.wordpress.com/julius-erving.jpg|w=800]]|| 줄리어스 어빙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1972년 열린 슈퍼게임 2. [[ABA 올스타전|올스타전]]항목에 일부 소개되어 있지만, [[http://cafe.daum.net/ilovenba/7i/26103?listURI=%2Filovenba%2F7i%3Fprev_page%3D11%26firstbbsdepth%3D006o4%26lastbbsdepth%3D006no%26page%3D15|NBA vs ABA]]의 대결이었던 이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ABA를 이끄는 차세대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다. 자금난으로 어쩔 수 없이 어빙을 트레이드한 뉴욕 네츠는 이후 [[드라젠 페트로비치]]가 나타날 때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어빙의 저주라고 불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